‘사람은 돼지로 살아도, 파시스트가 되어선 안 된다.’ 이 한 마디는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의 모든 정서를 꿰뚫는다. 1992년에 탄생했지만, 2025년의 우리가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그 감동은 오히려 더 크고 깊다. 자유에 대한 로망, 전쟁과 고립의 슬픔, 그리고 예술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간 군상. 이 모든 요소들이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거장의 감성과 맞물려, 단순한 애니메이션을 넘는 철학적 영화로 완성된다. 지금, 붉은 돼지를 다시 꺼내 들어야 할 이유다.
강점기의 그림자, 자유를 좇는 돼지 파일럿
『붉은 돼지』는 단지 비행기와 푸른 하늘, 그리고 귀여운 돼지를 그린 낭만 영화가 아니다. 그 이면에는 무겁고도 깊은 강점기의 그림자가 깔려 있다. 주인공 '포르코 로쏘'는 과거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기 조종사였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가 인간의 얼굴을 버리고 돼지로 살아간다. 육체가 돼지가 되었지만, 오히려 그는 인간보다 더 고결하게 살아간다. 이 영화가 감동적인 이유는 ‘탈인간화’를 통해 ‘진정한 인간성’을 조명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를 외면했지만, 그는 하늘을 날며 인간의 양심을 지킨다. 그의 말투, 태도, 침묵 속에는 일제 시대 혹은 군사독재 시절을 견뎌낸 어른들의 품위가 서려 있다. 그리고 붉은 돼지가 지나는 공간들, 아드리아해의 강렬한 태양과 에메랄드빛 바다는 그가 꿈꾸는 자유의 상징이자, 우리가 잃어버린 평화의 풍경이기도 하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관광청
📍 아드리아해 비행 코스 블로그
예술로 그린 현실, 색감과 공기마저 기억나는 영화
‘좋은 글이란 감정을 감정이라 쓰지 않고 감동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면, 『붉은 돼지』는 그 말을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미야자키는 “이야기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보여준다.”라는 철학을 실천한다. 푸르른 바다, 유유히 떠다니는 수상 비행기, 칠흑 같은 밤의 그림자 속에서 포르코는 단 한 마디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담배를 물고, 창밖을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는 슬프고, 외롭고, 무엇보다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다는 걸. 그의 집은 바다 위 외딴섬. 물결 소리와 바람, 한낮의 햇살이 침묵처럼 감돈다. 영화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대신,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현실의 감각’을 회화적으로 재현한다. 그곳은 현실 같지만 현실이 아니고, 꿈같지만 너무도 생생한 공간이다. 이것이 미야자키 하야오가 구축한 예술 세계의 본질이며, 『붉은 돼지』가 ‘한 폭의 명화’처럼 기억되는 이유다. 이처럼 영화는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공기의 질감’까지 담아낸다. 비행기 프로펠러 소리, 유리창에 부딪히는 파도, 이른 아침의 안개.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말한다. "이건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살아있는 한 편의 인생이다."
삶과 체념, 그리고 인간성에 대한 메시지
『붉은 돼지』는 이 시대의 모든 ‘어른 아이들’에게 바치는 헌사다. 포르코는 말한다. “나는 돼지로 살아도 괜찮아.” 그 말속에는 깊은 체념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지키고 싶은 철학도 있다. 그는 자본주의, 파시즘, 남성성, 군국주의를 모두 조롱하며 살아간다. 이 모든 것을 거부하고 ‘고립’을 선택한 그는, 우리 시대의 마지막 로망이자 유일한 저항 자다. 하지만 이 영화가 특별한 건, 그가 끝내 ‘사람’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이해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는 돼지로 남고, 침묵하고, 어디론가 날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오히려 그런 그가 가장 인간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영화는 그 어떤 대사보다도, 비행 장면 하나로 더 많은 메시지를 전한다. ‘진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진짜 자유는 어디에 있는가?’이 묵직한 질문을 90분 동안 그림과 음악으로 보여준다.
『붉은 돼지』는 나이 든 이들에게는 묵은 체념을, 젊은 이들에게는 어른이 된다는 것의 슬픔과 품위를 보여준다. 지금 우리가 이 영화를 다시 봐야 하는 이유는 단순한 향수 때문이 아니다. 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가 지금 우리의 시대, 우리의 마음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나는 돼지, 침묵하는 반항아, 말없이 떠나는 로맨티스트. 그는 바로, 우리가 되고 싶었던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지금 더 깊이 와닿는다. 마치 오래된 편지처럼. 읽고 또 읽어도, 마음 한 켠이 찡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