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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고싶은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윤여옥, 장하림, 최대치)

by dahebojago 2025.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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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의 눈동자 주인공들 최재성 채시라 박상원

1991년 방영된 MBC 대하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는 단순한 전쟁 서사가 아니라, 식민지와 전쟁, 해방과 분단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굴곡 속에서 운명적으로 얽힌 세 인물—윤여옥, 장하림, 최대치—의 삶을 통해 인간의 고통, 신념, 그리고 사랑을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이 글에서는 세 인물의 서사를 중심으로 ‘여명의 눈동자’가 오늘날까지도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를 조명해 본다.

윤여옥 – 역사의 증인이 된 여성의 초상

윤여옥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역사의 잔혹함을 온몸으로 겪은 생존자이자 증언자다. 남원 출신으로 경성 유학 중이던 여옥은 독립운동가인 아버지의 흔적을 이유로 강제로 위안부로 동원되어 만주로 끌려간다. 거기서 일본군의 폭력에 노출되고, 이후 난징과 사이판 등지에서 비참한 삶을 이어간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포기하지 않는다. 여옥의 사랑은 최대치를 향하지만, 이 사랑조차 역사의 폭력 앞에 끊임없이 시험당한다. 사이판에서 임신한 채 미군의 포로가 되어 장하림을 다시 만나고, 전후에는 OSS 요원으로 활약하며 독립운동에 기여한다. 기생으로 위장해 스파이로 활동하고, 부민관 폭탄 의거에까지 참여한 그녀는 결국 모진 고문을 견디다 해방을 맞는다. 해방 후에도 그녀의 삶은 순탄하지 않다. 위안부였다는 낙인, 여전히 남아 있는 친일 세력, 전쟁의 상처로 인해 고통받는 가운데에서도 그녀는 “기억하겠다”는 의지를 잃지 않는다. 여옥은 역사의 어두운 면을 말없이 견뎌내며, 동시에 그 어둠을 증언하는 인물로 남는다.

장하림 – 이상을 짊어진 고독한 지식인

장하림은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재학 중 일본의 민족 차별과 식민지 현실을 체감하며 전장에 투입된 그는, 731부대에서 인류에 대한 참혹한 실험과 마주한다. 점차 회의에 빠진 그는 세균실을 폭파하고 미군에 투항, 이후 OSS 요원으로 활동한다. 전쟁이 끝난 후 여옥과의 사랑이 싹트지만, 최대치가 살아 돌아오며 그 관계는 끝나버린다. 하림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북파공작원이 되어 월북, 북한 고위층으로 잠입해 첩보 활동을 수행하지만 결국 발각돼 임진강을 넘어 탈출한다. 이후 제주 4.3 사건 수습에 파견돼 민중을 보호하려 애쓰지만, 결국 체제의 벽 앞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장하림의 여정은, 이념과 이상이 어떻게 현실에서 왜곡되고 소모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결코 영웅이 되지 못했지만, 끝까지 인간으로 남으려 했던 진정한 지식인의 초상이기도 하다.

최대치 – 전쟁에 휘말린 비극의 청년

최대치는 평범한 청년에서 전쟁의 괴물이 되어가는 인물이다. 개성의 대장장이 아들로 북경대학 유학 중 강제 징집되어 일본군 학도병으로 전장에 나가게 된다. 남경에서 윤여옥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임팔 작전으로 이별을 맞는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전우의 시체를 뜯어먹으려는 일본 상사를 살해하고 탈출하는 대치는, 팔로군에 의해 구조된 뒤 독립운동가 윤홍철을 희생시켜 장교로 출세한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점차 인간성을 잃어간다. 무차별 학살과 정치적 암살을 반복한 끝에 그는 결국 팔로군에서 추방돼 마적단으로 흘러들어 간다. 전우도, 애인도, 신념도 잃은 채 살아가던 대치는 마적 두목을 죽이고 조선인 마을을 구하려다 오히려 주민들에게 배신당하고, 소련군에 의해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다. 해방 후 귀국해 여옥과 재회하지만, 전쟁의 상처는 여전히 그의 삶을 갉아먹는다. 좌익 운동에 참여하면서 점차 가정과 멀어지고, 끝내 여옥마저 잃고 만다. 최대치는 전쟁이 만들어낸 인간의 또 다른 얼굴, 끝없이 무너지고 마침내 소외되는 존재의 비극을 상징한다.

 

‘여명의 눈동자’는 윤여옥, 장하림, 최대치라는 세 인물을 통해 전쟁과 이념, 사랑과 신념이 얽힌 근대사의 거대한 비극을 서사화한 작품이다. 이 드라마는 특정한 영웅을 찬양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의 한복판에서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이들의 고뇌를 생생히 드러낸다. 우리는 이들의 선택을 보며 묻는다. “그 시대에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이것이야말로 ‘여명의 눈동자’가 지금도 여전히 회자되는 이유다. 역사의 가장 어두운 순간을 견뎌낸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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